2016. 5. 16. 23:42ㆍ지혜롭게,/책,영화
심플한 책 표지가 일단 끌렸다.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날카로운 아이디어는 뭉툭한 일상에서 나온다!" 라는 문구도 마음에 들었다.
망설임 없이 책을 구입했고, 프롤로그를 읽으며 이 책이 나와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나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안 좋은 기억력"이었다.
'아, 나같은 사람이 또 있었구나. 나처럼 기억력이 너무 안좋아서 치매인지 고민하고, 같은 일도 남들보다 몇배 노력해야 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남들보다 성실해지고...'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일종의 위로와 안심이랄까? 그런 사람이 두뇌가 뛰어난 사람들만 한다는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신선했다.
프롤로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능력을 상실한대신 나는 '성실'이라는 능력을 얻었다. 말 그대로 나는 끊임없이 읽고, 보고, 찍고, 경험하고, 배우는 부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인간 부류에 속한다."
나도 항상 잘 까먹어서 메모하고, 사진 찍고, 심지어 관련 있는 사람에게 "나 까먹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알고 있어."라고 미리 말을 해놓기도 한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자주 하는 소리가 "쟤가 진짜 까마귀를 먹었나... 너는 어떻게 항상 그렇게 깜빡 깜빡 하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물건은 잘 챙기는 편이여서 지금껏 내 물건을 잃어버린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한번 잃어버리고 나면 도무지 찾질 못한다. 얼마 전에도 새로 산 목걸이를 잃어 버렸다. 분명 퇴근 길에 가방에 넣었고, 집에 와서 꺼낸 것 같은데 몇 일 뒤에 찾으려고 했더니 어디에도 없다. 참, 칭따오 여행에서는 숙소에 두고 온 여권을 분명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잃어버렸다고 그렇게 우겨서 고생 아닌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 싶을 정도로 한심한 사건이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 순간은 무척 몰입도 하고, 감정 이입도 하여 여러 감정을 느끼지만 나는 결국 등장인물들,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며, 얼마 지나면 스토리도 가물가물하다. 이런 내 자신을 볼 때마다 내가 참 멍청한 걸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더 이상 책을 정갈하게 보는 것에 관심이 없다. 줄을 긋고, 생각을 메모하며 책을 못살게 굴고 싶다. 그렇게 못살게 굴어도 나는 그 책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수준이니까."
참 웃픈 내용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공감 되는 말이다.
"상상하는 시간이 있다. 조금 더 나이가 든 내가 책장 앞에 서서 어떤 책을 손 가는 대로 펼친다. 내 글씨를 발견한다. 내가 해둔 체크표도 발견한다. 왜 그곳에 그런 메모를 해놓은 건지, 그 구절의 어떤 부분이 좋았길래 체크를 해놓은 건지 쉽사리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거기에서 발견한다. 그때의 내가 궁금해서 다시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책을 발견한다. 그리고 새로운 부분에 새로운 감정으로 줄을 긋는다. 그렇게 영원히 새로운 책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내 유난한 기억력이 준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면 되지. 받아드리자...
저자와 나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역사치' 라는 것이다. 학창시절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과목은 역사였다. 한국사는 미친듯이 반복해서 외워 시험을 봤지만, 세계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고, 각종 인물들의 이름은 내 머릿속에 전혀 새겨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렸을 때 역사와 관련된 어떠한 만화나 책도 접한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선사유적지 외에는 어떤 박물관에도 데려가시지 않았으니까...그래서 어릴 때 여기저기 많이 데려가고, 체험학습이니 뭐니 하나보다...
"누군가의 험담을 듣고 "한쪽 이야기만 들어서는 모르지."라고 말하며 균형을 잡는 사람이라면 신뢰를 하게 된다. 한쪽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한쪽을 고스란히 평가하지 않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아무리 해도 나는 잘 안 되니까."
한쪽 이야기만 듣고 전체의 상황을 내맘대로 이해하는 행동은 꼭 고쳐야 겠다고 생각한다.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젊은 시절 내내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거울을 보면 아빠와 똑닮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느끼는 것 중에 하나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아빠의 모습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뭔가를 한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한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리고 행복해한다. 비옥한 토양의 주인이 되어 비옥한 웃을을 짓는다. 나는 알고 있다. 그 땅엔 이미 '나'라는 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을. 그 나무가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그 이상을 바란 적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나도 저자처럼 나의 유난한 기억력을 받아드리고, 이제는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읽고, 듣고, 찍고, 쓰고, 배우며 살아가야 겠다. 비옥한 내 토양을 위하여. 언젠가 이곳에서 자랄 나무와 꽃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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